위지위그 — 안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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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처현대문학2025년 12월호 · 통권 8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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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서 고른 문장
5개 발췌발췌 01
직부등이 깜빡거리면서 어질러진 서재가 드러났다. 책장마다 열화된 종이 뭉치가 밴딩 끈으로 묶여 켜켜이 쌓여 있었고, 여러 종류의 기상학 서적과 커다란 하우다치즈 같은 자기테이프가 세로로 꽂혀 빈틈없는 구성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 책장의 사이 공간으로 욱여넣은 자료까지 더해지면서 몇몇 운 나쁜 아래 칸 책들은 그대로 단단히 굳어버린 듯했다. 그래선지 서재에 들어섰을 때 창가 앞쪽의 잘 정돈된 책상이 유독 시선을 끌었다. 원목 책상 앞으로 간 그는 빈 화분과 뭉툭한 연필, 엽서를 차례대로 보다가 책꽂이에서 '기상 기록 목록' 라벨이 붙은 사료집을 꺼냈다. 30년의 세월에 걸쳐 하루 두 번 매일 관측한 기상 요소를 페이지마다 수기로 적은 자료였다. 대기 중 건구 온도와 습구 온도를 비롯 풍향, 강수량, 최고• 최저 기온이 수치화된 데이터를 표시하고, 눈으로 직접 확인한 기상 현상의 개괄적인 인상을 비고란에 적어둔 것인데, '뇌우가 발생하기 30분전. 동서쪽에 출현한 적란운을 브루스와 산책하던 마야가 발견하였음. 영특한 아이, 나의 천사'나 '제트기류의 위치와 패턴상 오랜 한파가 예상되나 애들은 망연히 올라프와의 재회를 반김' 같은 감상적인 메모도 섞여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과연 '환경'을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기상 기록 목록에 나타났듯 매개변수를 토대로 매핑하여 기후를 연구한다 해도 대기 현상은 언제나 예측한 추세 선 에서 벗어나기 일쑤였다. 가령 관측 날짜가 흐를수록 비고란에서 퇴장해 사라져버린 그의 가족 이야기처럼.
안종성 · 『위지위그』
발췌 02
로프처럼 잡고 있던 문고리에서 손을 떼면서 그의 몸은 뒤로 넘어 갔다. 뻣뻣해진 어깨를 시작으로 뒤통수까지 이어지는 목덜미 근육에서 그는 경련을 느꼈다. 딱딱한 바닥에 눕자 다소간 몸을 경직시켰던 긴장감은 풀어지고 두 눈이 무겁게 감기었다. 적당한 한기는 신체를 아늑함으로 이끈다. 반듯하게 못자리에 눕듯이 그는 양손을 가슴에 포개었다. 그러자 바닥 아래로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구역질을 일으키기보다 몸을 나른하게 만드는 하강감이었다. 지난밤은 그를 몹시 노쇠하게 만들었다. 그사이 아주 늙어버린 것일지 몰랐다. 잠기운의 장막이 머리 위로 드리우고, 정신은 실타래처럼 풀어지면서 세 가지 강령을 뜻하는 문장이 한데 모여드는 까마귀 무리처럼 사방에서 나타났다. 1. 바깥에 나가지 말라 2. 환경에 적응하라 3. 나를 기다리라
안종성 · 『위지위그』
발췌 03
빗방울이 유리창에 맺혀 점점이 떨어졌다. 바닥에서 눈을 뜬 그는 몸을 말며 떨었다. 저택의 보이지 않는 틈새로 외풍이 조금씩 들어 오는 듯했고 어디선가 비닐이 파르르 떨리는 소리와 전자 제품이 가동하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그는 저택이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말한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 그렇다면 거실의 괘종시계 옆에 비스듬히 꽂힌 도끼나 저절로 발생하곤 했던 화재는 스스로 무너지기를 택한 것일까. 그는 나무토막과 조간지를 뭉쳐 화목 난로에 깔아둔 다음 성냥을 피워 던져 넣었다. 불꽃이 서서히 번지면서 그를 붉은빛으로 물들였다. 일렁이는 불길을 베이스 삼아 장작의 안쪽부터 타들어가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튀었다.
안종성 · 『위지위그』
발췌 04
P는 차연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저게 뭔 줄 알고 그래. 차연은 몸을 비틀며 대답했다. "폭탄이라잖아요." 차연의 순서가 되었을 때 어깨너머로 본 물건의 형태는 거친 질감의 입자가 단단하게 밀집된 듯했다. 향기가 모두 달랐던 것처럼 색깔과 구성도 상이했는데, 마침내 P의 손에 쥐여진 물건의 경우 파란색과 갈색의 배합으로 행성을 연상시키는 모양새였다. "이게 뭐라고?" 구체에 코를 가져 댄 P가 물었다. 그러자 헨드릭이 두 손 사이에 넣고 빙글빙글 돌리며 대답했다. "배스밤이지. 내가 하는 사업이란 게 이걸 파는 거야." P가 말했다. "어떻게 쓰는데?" "일단 욕실로 가야겠지. 멋진 풍경을 보며 서서히 풀리길 기다리고." 한편 반지하 파티장에 머무는 이들은 돌아 가며 그들이 가진 욕조 이야기를 나눴다. "귀국하면 꼭 써봐야겠어. 수제 배스밤은 처음이라서." 사찰을 좋아한다던 캐나다인 남성이 말했다. "여독을 풀기에 좋겠네. 우리 집의 욕조가 정말 아름답거든." 일본인 여성도 말했다. 욕실 모서리에 반달꼴로 배치된 아크릴 코너 욕조, 인테리어와 조화를 이루는 매립형 욕조, 틀에 맞춰 굳힌 다음 유약 코팅으로 마감한 법랑 욕조, 흰색의 단정하면서도 단단한 실키 욕조가 그들이 나누는 추억 속에 등장했다.
안종성 · 『위지위그』
발췌 05
"알고말고. 우린 돈독한 사이잖아. 이미 서로의 이름도 알 만큼." 헨드릭이 말했다. "내가 살던 곳에 오리가 아주 많았어. 너무 넘쳐서 때로는 강가에서 물고기를 볼 수가 없었지. 뒤뚱거리며 돌아다니는 오리뿐이었어. 포식자도 없고 좋았을 텐데 그럼에도 오리들은 남쪽 지대로 날아가고 싶어 하더라고." 헨드릭은 옆으로 누운 채 손으로 머리를 괴고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지. 마을의 어른들이 오리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한쪽 발목과 날갯죽지를 부러뜨려 놓았거든. 젊고 건강한 오리가 새끼를 낳아야 계속 잡아먹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자 오리들이 떠나는 일은 없어졌고 마을 어른들은 자식들에게 '우리 호수 부근이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곳이라는 걸 알아서 남아 있는 거란다'라고 말해주었어. 오리들이 열심히 새끼를 치고, 그렇게 태어난 새끼는 또 무럭무럭 자라서 새끼를 치고, 또 치고. 개체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더군. 마을 사람들이 잡아가는 숫자도 그대로였으니 어느 순간부터는 오리는 사람을 봐도 도망가지 않았어."
안종성 · 『위지위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