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N JONGSUNG안종성

서브리미널 — 안종성

AHN JONGSUNG · 안종성

서브리미널 · 문장웹진 · 2026년 3월 1일

전체 작품으로 돌아가기 작품 입구 · 서브리미널
서브리미널로 내려가기

서브리미널

읽는 곳

빛과 면으로 구성한 전시 시안

서브리미널

발표처문장웹진2026년 3월 1일
공식 원문 읽기문장웹진 · 공개된 작품 전문새 창

작품에서 고른 문장

4개 발췌
발췌 01
여러 대의 카트가 교차 레일 지점을 충돌 없이 지나갔다. 높은 위치를 누비면서도 질서 정연히 움직일 줄 알았다. 출로에 다다를 때쯤 천천히 감속하더니 허공에 뚫린 검은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윤무의 눈동자는 천장 주행 장치의 행렬을 따라가는 중이었다. 그 장면으로부터 슬픈 기분을 느끼고는 습관처럼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떠오르는 생각을 어떻게 붙잡아 두는가? 그러나 기록할 도구를 찾지 못한 윤무는 걷기로 했다. 산책하며 생각을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벽과 바닥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흰 공간이 광활하게 펼쳐졌다. 소리와 냄새, 온도, 어떤 예감마저 느낄 수 없었다. 윤무는 이곳을 알 것만 같았다. 얼마 전 필경사와 무한한 흰 공간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필경사는 권면에 들기 전 미리 가서 둘러볼 것을 권했다. 깨어날 때 부분적인 기억상실이 있을 테지만 영원히 망각한 게 아니라서 살다 보면 어느 순간 권면 전의 삶이 되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필경사는 뇌의 저장 용량을 컴퓨터 저장 단위로 환산하면 2.5페타바이트에 달함에도 인간의 상상력이 쉼 없이 활동하므로 정보를 선택적으로 보관한다고 말했다. 필경사는 인간의 신체가 권면과 죽음을 구분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필경사는 기억 편람의 업로드가 끝나면 직계 가족이라 할지라도 오십 년 뒤에나 조회할 수 있다고 했다. 필경사는···. 구축 아파트에서 볼 법한 편복도를 지날 때 윤무는 재건축 직전의 폐허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호수마다 잡동사니가 나뒹굴거나 무가지가 쑤셔 박혀 있었다. 앞바퀴 없는 자전거도 복도를 비좁게 만들었다. 윤무는 그중 현관문이 열린 곳에 서 있다가 인기척을 듣고는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안종성 · 『서브리미널』

발췌 02
컨설턴트는 저의 양친 이야기를 했습니다. 두 분이 권면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는데 임대 중인 주택을 처분하길 원한다는 겁니다. 잔병치레 없이 멀쩡하게 살고 계시는 양친이 권면하는 것도 황당한데 당장 자식 사는 집을 팔다니요. 그곳엔 마도카 씨와 제 혈육인 미키코가 살고 있었습니다. 분명 집을 계약할 때 양친 명의로 했고 계약금은 전부 양친 재산이라지만···. 듣고만 있었던 윤무는, 어쩌면 권면 후의 삶 때문이겠군요, 라고 말을 보탰다. 마토메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컨설턴트 말에 따르면 권면자는 법적 사망자도 아니고 살아 있는 시민이기 때문에 세금을 내야 한답니다. 깨어난 후의 삶과 세납을 위해 재산은 국부 펀드에 귀속시키고 컨설턴트들로 하여금 일정 기한까지 이를 부풀려 준다는 겁니다. 세상에. 이걸 믿다니요. 얼버무리고 있던 마토메의 앞으로 화면 속 컨설턴트는 짧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래서 자식이 알아서 유산상속을 포기하는 거잖아요, 마토메 씨. 그게 효도고요.

안종성 · 『서브리미널』

발췌 03
‘CLEAN MEAT’이라고 적힌 전광판 아래에는 수많은 사람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마토메는 배양육 판매대에서 벗어나 보다 품질이 낮은 냉동육이 있는 곳으로 갔다. 시시각각 상품이 바뀌는 진열대를 응시했다. 여러 가축의 부위가 한데 모인 진열대는 먹히기 위해 존재하는 불명의 생물체 같았다. 다음 제품으로 교체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의 얼굴이 잠시 유리판에 반사되었다. 그는 권면하는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어림잡아 마토메보다 서너 배 정도는 될 법한 고기 진열대가 관처럼 그를 담을 것이다. 시대로부터 부름을 받을 때까지 악성 재고처럼 보관될 것이다. 뼛속까지 틈입하는 냉기, 그리고 정지된 시간은 갈수록 익숙해질 것이다. 꽃 피지 못한 씨앗이나 싸늘한 창고 영화같이 조금의 가능성만 품은 채로. 한기를 느끼던 마토메는 진열대에 배양육이 나타나자 헛구역질했다. 얼고 싶었죠. 저도 얼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그것 또한 다른 의미에서 수면일 테니까요. 마토메는 강한 향신료에 볶은 냉동육 요리를 쌀밥에 얹어 먹었다. 방 안에서 마도카 씨와의 영상 통화만 켜 둔 채였다. 마도카 씨는 일본 청년들이 권면하는 길을 선택한다는 사회면 기사를 공유했다. 이어서 마도카 씨는 그래, 차라리 얼어 버리는 건 어때요? 혹시 유능한 컨설턴트가 우리 재산을 폭발적으로 늘려 놓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라고 말했다. 듣고 있던 윤무는 그것이 전혀 없는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마토메는 웃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마도카 씨는 그저 답답하니까 농담하고 싶었던 거겠죠. 그렇지만 저는 잠시만이라도. 아주 잠시만이어도 좋으니 놓고 싶었답니다. 지금도 그래요. 얼어 버린다는 거, 어떨까요. 아플까, 괴로울까, 답답할까, 다르지 않을까. 아아, 그 뒤로 제대로 잠들 수가 없었다니까요.

안종성 · 『서브리미널』

발췌 04
마침내 별빛이 찬란하게 반짝이는 우주까지 도달해 버린 노인은 살을 에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자신을 끌어당긴 빛줄기의 출처를 따라갔다. 그러나 더 이상 빛은 그의 정수리에 달린 것이 아니라 따로 떼어져 있는 것이었고, 노인은 그 줄을 생명줄처럼 복부에 칭칭 감아 유영했다. 거대한 성운에서 역동적으로 뿜어져 나온 빛은 거침없이 지구로 향했다. 그 광자 속에서 혈액처럼 흐르는 인자가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냈으며, 노인의 신체를 끌어당겼다. 빛이 빚은 성운을 지나다니는 노인의 발은 어디 한 곳을 디딜 수 없었다. 눈앞에 무수히 관통하는 우주의 구름 속으로 펼쳐지는 장면과 붙여진 이름, 행적, 날씨, 장소, 음성언어. 그것이 한데 어우러져 만드는 이야기의 원형이 펼쳐지고 있음에 매료되었다. 먼저 잠든 양친의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지금껏 마주친 인물의 얼굴이 빠르게 지나치는 열차의 유리창과 같이 스쳐 갔다. 노인이 알고 있는 모든 서사의 고향이었다. 또한 지금까지 있어 온 문장과 앞으로 적히게 될 문장의 출처였다. 읽고 있는 동안에는 숨을 쉴 필요가 없었다. 온전히 다른 세계였으므로. 평생을 따라다닌 현기증과 척추협착증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개헤엄을 하듯 두 손을 앞으로 뻗은 채로 언제나 자신을 어디론가 이끌었던, 다음 이야기를 발견하고 싶은 욕망을 순순히 따라갔다. 그러자 손바닥 아래에서 하나의 물건이 쥐어지게 되는데, 그것을 책이라 자각했으나 직사각 형태의 익숙한 모습과 다르게 생경하게 생긴 원통형이었으며 어떤 페이지에 검지를 넣고 읽어도 시작이자 끝인 구성이었다. 노인은 원통형 책을 끌어안고 망막한 우주 같은 어두운 무대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영원히 읽을 수 있다. 영원히. 노인, 쾌재를 부르짖는다. (암전)

안종성 · 『서브리미널』

서지·작품 정보

안종성

2025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했습니다.

작가 소개